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 프랑스 (문단 편집) === 비시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 === 하지만 전쟁 수행에 있어서 가장 큰 힘인 프랑스 본국은 [[비시 프랑스]]와 [[나치 독일]]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유 프랑스는 [[식민지]]들을 장악하여 그 곳의 자원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. 그래서 자유 프랑스는 가담한 소수 병력으로 [[영국]]과 협력해 식민지들을 설득하거나 비시 프랑스에 충성하는 식민지군을 패퇴시켜 장악하기로 결정했다. 그러나 전쟁 초기 [[프랑스 식민제국|해외 프랑스 식민지]] 대다수는 [[비시 프랑스]]를 지지하고 있었다. 가령 1940년 6월 자유 프랑스 수립 당시 수십 개에 달하는 [[아프리카]] 내 프랑스 식민지 중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던 식민지는 [[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]], 그 중에서도 [[펠릭스 에부에]]가 총독으로 있던 [[차드]] 하나 뿐이었다. 하지만 에부에의 설득으로 1940년 8월까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구성 식민지인 [[우방기샤리]], [[프랑스령 카메룬]], [[프랑스령 콩고]]도 자유 프랑스 편에 가담했으며 1940년 11월 영국의 도움으로 [[가봉]][* 원래 가봉 총독은 자유 프랑스에 가담하려고 했으나 현지 [[가톨릭교회]] 선교사들의 압력으로 비시 프랑스에 충성하기로 마음을 바꿨다. 당시 프랑스와 그 식민지에 있던 가톨릭교회 성직자 다수는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다.] 장악에 성공하면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전체가 자유 프랑스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. 하지만 프랑스령 아프리카 전체를 장악하려는 시도는 1940년 9월의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Battle_of_Dakar|다카르 해전]]으로 한동안 차질을 빚었다. [[아시아]]와 [[오세아니아]]의 경우 가장 큰 식민지인 [[프랑스령 인도차이나]]가 [[일본군]]의 통제 하에 있었으나 [[퐁디셰리]] 등의 프랑스령 인도가 가장 먼저 자유 프랑스 편을 들었으며 1940년 8월까지 [[누벨칼레도니]], 프랑스령 [[폴리네시아]], 영국과의 공동 식민지인 [[바누아투]]가 자유 프랑스 편을 들었다. [[중화민국]] 대륙 내 프랑스의 조차지인 잔장도 자유 프랑스 편을 들어 1941년 12월 일본군이 점령할 때까지 중화민국과 자유 프랑스 간의 외교 통로 역할을 수행하였다. 처음에는 식민지 대부분이 비시 프랑스에 충성했지만 영국의 도움으로 1940년 6-12월까지 프랑스령 아프리카 중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전부를 장악했다. 미국은 비시 프랑스 정권 수립 당시 이 정권을 프랑스 정부로서 승인했지만 [[진주만 공습]] 직후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하자 자유 프랑스 승인으로 입장을 급선회했다. 1941년 2월 자유 프랑스군은 [[이탈리아령 리비아]]의 일부인 키레나이카로 진격하였다. 동년 6월 자유 프랑스군은 [[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]][* [[에리트레아]]와 [[소말리아]], 그리고 1936년 합병한 [[에티오피아]].] 장악을 위한 동아프리카 전역에 참여하였으며 7월에 프랑스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이던 [[시리아]]와 [[레바논]]을, 12월에는 생피에르 미클롱을 점령하였다. 1942년 6월에는 연합군이 [[마다가스카르]]에 상륙한 11월 [[마다가스카르 전투|마다가스카르를 완전 점령]]하면서 마다가스카르가 자유 프랑스의 통제하에 들었다. 그리고 아프리카 방면에서 추축군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2년 11월 8일, [[횃불 작전]]으로 영-미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. 추축군의 패색이 짙어졌기 때문에 영-미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의 비시 프랑스군이 순순히 항복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예상 외로 비시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상륙에 격렬히 저항했고 연합군은 예상보다 더 많은 피해를 내게 된다. 어찌 됐든 간에 상륙 당일 [[알제]]에 있던 비시 프랑스군 지휘부는 [[레지스탕스]]의 [[쿠데타]]로 인해 힘 한 번 못 써보고 포로로 잡혔으며 ,사령관이던 [[프랑수아 다를랑]] [[제독]]은 연합군 총사령관 [[드와이트 아이젠하워]] [[장군]]과 협상에 나서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사령관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. 당연히 드골 장군은 격렬히 반대했으나[* 사실 이건 다를랑이 다 된 밥에 숟가락을 올려놓는 행위나 마찬가지라 드골이 반대할 만했다.] 연합군의 압력으로 이를 인정해야 했다. 그리하여 11월 10일 다를랑 제독은 휴전을 지시하고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비시 프랑스군은 항복하였다. 이리하여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전체와 프랑스의 보호령이던 [[모로코]][* 모로코 통감은 샤를 누게 대장으로, 레지스탕스 지도자인 조르주 멘델을 [[나치 독일]]로 넘기는 등 적극적으로 제3제국에 부역해,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. 그러나 그는 10년 가까이 도피하였고 정작 1954년 프랑스에 귀국했을 때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.], 그리고 프랑스 본국의 일부로 취급되던 [[알제리]]까지 자유 프랑스의 통제 하에 들었으며 그동안 임시 수도로 사용하던 [[브라자빌]][* 명목상 브라자빌이 임시 수도였을 뿐, 실제 망명 정부의 소재지는 영국 [[런던]]이었다.]에서 알제로 수도를 옮겼다. 이후 한동안 알제를 임시 수도로 사용하다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 때부터 [[파리(프랑스)|파리]] 해방 시까지 [[런던]]을 망명 정부 소재지로 사용하였다. 횃불 작전과 다를랑의 배신에 격노한 [[아돌프 히틀러]]는 비시 프랑스의 완전 점령을 지시, 11월 11일 [[독일군]]과 [[이탈리아 왕국군]]이 안톤 작전을 개시하여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이 맺었던 협정을 파기하고 비시 프랑스 전역을 완전 점령하였다. 독일의 협정 파기에 분노한 비시 프랑스 해군은 11월 27일 [[툴롱]]에 정박 중이던 자국군 함대를 자침시키는 거사까지 감행하여 독일의 점령에 저항하였다.[* [[필리프 페탱]] 국가수반과 가브리엘 오팡 해군 참모총장이 장 라 보르드 대장에게 함대를 연합군에게 양도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, 라 보르드 대장은 그냥 자침시켜 버렸다.] 한편 위의 소식을 접한 아프리카의 비시 프랑스군 또한 비시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을 상실하고 대거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하면서 자유 프랑스군은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다. 1942년 12월 28일, 1년 9개월 간의 봉쇄 끝에 프랑스령 소말릴란드가 항복하고 1943년 초, 과들루프와 [[마르티니크]]를 위시로 한 프랑스령 [[서인도 제도]]와 [[프랑스령 기아나]]가 자유 프랑스 편에 가담하였다. 마지막으로 1943년 5월, 추축군 세력이 최후까지 저항하던 [[튀니지]]까지 연합군이 점령하면서[* 튀니지 통감은 [[https://en.m.wikipedia.org/wiki/Jean-Pierre_Esteva|장 피에르 에스테바 해군대장]]으로 이미 국가해방위원회 위원장인 [[앙리 지로]] 육군대장이 반역혐의로 사형을 때린 인물이다. 프랑스 해방 후 에스테바 대장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가석방된다.] 종전 시까지 일본군이 통제하는 [[프랑스령 인도차이나]]를 제외한 프랑스 식민제국의 모든 식민지가 자유 프랑스의 통제하에 들게 되었다.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고등판무관은 [[프랑스 해군]][[대장(계급)|대장]]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Jean_Decoux|장 드쿠]] [[제독]]이었는데 [[일본인]]이 아닌데다가 길을 빌려달라는 약속과는 다르게 일본은 실질적인 통치를 원했고, 드쿠 제독은 일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, 일본군이 그를 감금하고 고등판무관직을 폐지해버렸다. 전후 장 드쿠는 반역혐의로 기소되나 무죄로 풀려난다. 이 때부터 전쟁 내내 계속 껄끄러운 사이였던 미국 또한 자유 프랑스를 프랑스의 정식 정부로 인정하고 대규모 물자 지원을 통해 밀어주기 시작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